57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상영 시간 57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짧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너무 짧다.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보기 잘했다.
체인소 맨과 파이어 펀치의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만화를 그리는 두 소녀의 이야기,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우정과 시기, 상실과 연결. 설명하자면 이렇게 담담하게 정리가 되는데, 막상 보고 나면 '찬란했다'는 말 이외에 더 나오는 말이 없다. 그냥 진짜로 찬란했다. 이 말 이상이 나오질 않는다.
영화 룩백(2024) 기본 정보
- 감독: 오시야마 키요타카
- 장르: 청춘, 성장, 드라마
- 원작: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 만화 '룩 백' (2021)
-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두리안
- 출연 (성우): 카와이 유미, 요시다 미즈키
- 주제곡: urara - Light song (by haruka nakamura)
- 개봉일: 2024년 9월 5일 (대한민국)
- 상영 시간: 57분
학년 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하며 자신의 그림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 어느 날 등교 거부 동급생 쿄모토의 만화를 보고 그 실력 차이에 경악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의욕을 잃고 만화를 포기하려던 후지노는 졸업식 날 처음 만난 쿄모토로부터 계속 팬이었다는 말을 듣고, 둘은 함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만화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어진 두 소녀의 사계절 이야기다.
등장인물 — 둘만의 이야기로 꽉 채운 4컷
후지노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림에 자신감이 넘치다가 쿄모토를 만나고 흔들리고,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고, 때로는 쿄모토와의 사이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처음엔 그냥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끝까지 보고 나서야 그 모든 게 어린 소녀가 누군가를 그만큼 아꼈기 때문에 나온 투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손을 내밀고, 손을 붙잡고, 뒤를 맡기는 인물이다.
쿄모토
세상과의 단절 속에 그림만이 전부였던 소녀. 후지노에게 계속 팬이었다는 말 한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한줄기 빛과도 같은 동경의 대상의 뒤를 따라 세상 밖으로 나온 인물인데, 이 쿄모토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깊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보고 나서도 남긴 했다. 그랬다면 영화가 조금 더 길어지고 어두운 이야기가 됐겠지만, 그건 아마 57분이 너무 짧게 느껴진 마음에서 나온 바람이었을 것 같다.
좋았던 점들
57분 안에 다 담아낸 것들
상영 시간이 57분이라는 게 처음엔 짧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고 나서는 이 길이가 이 이야기에 가장 잘 맞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서사를 충분히 넣지 않고 주변 인물들도 많이 그려내지 않은 방식이 오히려 두 소녀만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고, 만화와 그림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더 돋보이게 한다. 군더더기 없이 꽉 찬 57분이었다.
'룩 백'이라는 제목에 대한 정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믿고 뒤를 맡긴다는 것, 누군가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지 이 영화는 끝에 가서 친절하게 보여준다. 룩 백이라는 제목에 담긴 정의가 자연스럽게 감탄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멋진 말을 남기고 싶은데, 그냥 찬란했다는 말 이상이 나오지 않는다.
판타지적 요소가 오히려 몰입감을 만들어낸 방식
만화라는 장르가 주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데, 그게 꿈만 같은 이야기로 겉돌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판타지적 장치가 두 소녀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상상이든, 현실이든, 그 경계가 흐릿하게 느껴지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은 선명하게 남는다.
둘만의 이야기에 집중된 구조
주변 인물들을 많이 그려내지 않고 두 소녀의 관계에만 집중한 구조가 이 영화의 강점이다. 시기와 질투, 뒤늦은 인정, 그리고 도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어 얻은 것이 분명히 더 많은 두 소녀의 관계가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밀도 있게 담겨있다. 4컷 만화라는 소재가 이 영화의 서사 방식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웠던 점들
57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좋았던 점을 아쉬운 점으로 다시 쓰는 셈이긴 한데, 보고 나서 가장 강하게 남는 감각이 이것이다. 더 보고 싶다는 마음. 쿄모토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깊었다면 어땠을까, 두 소녀의 사계절이 조금만 더 길게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다. 물론 이 길이가 이 이야기에 맞는 선택이었다는 건 알면서도, 그냥 더 보고 싶었다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뭉클한 음악이 과하게 깔리는 구간
음악이 감정을 밀어붙이는 구간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순간들에서 슬픔이 크게 밀려오지는 않았다. '울어'라고 뭉클한 음악을 많이 깔아주는 느낌이 드는 구간이 있는데, 감정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보다 유도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부분이었다. 감정이 메말랐던 건지, 아니면 음악이 조금 과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지노를 처음에 이해하기 어렵다
초반에 후지노라는 캐릭터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쿄모토와의 갈등 장면에서 특히 그 이해가 더 어려워지는 구간이 있다. 끝까지 보고 나면 다 납득이 되는 구조이긴 한데, 그 과정에서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늦게 시작된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어린 소녀라는 걸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장치가 있었다면 초반 몰입감이 더 빠르게 생겼을 것 같다.
쿄모토의 서사가 더 깊었으면 했다
후지노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쿄모토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세상과의 단절 속에 그림만이 전부였던 소녀가 후지노를 보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그 과정이 조금 더 촘촘하게 그려졌다면 두 소녀의 관계가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다. 이건 결국 57분이 짧다는 아쉬움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이긴 하다.
나의 등을 쫓아와 준 것도,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준 것도, 결국 서로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머릿속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손을 내밀고, 손을 붙잡고, 뒤를 맡기고, 뒤를 따라가는 장면들. 세상의 모든 것과 누군가의 추억이 짧은 4컷일지라도 뒤돌아볼 가치는 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57분 안에 담아냈다.
삐딱하게 봤든, 옳게 봤든, 확실한 건 보기 잘했다는 것이다. 이 두 천재 소녀들은 어쩌면 좋나 하면서 봤고, 끝에 가서는 그냥 찬란했다는 말만 남았다. 나의 등을 열심히 쫓아와 주고 믿어줘서 고맙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준 뒤를 내주어서 고마웠던, 두 소녀의 이야기.
결론 및 최종 평점
57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찬란했다는 말 이상이 나오지 않는 영화.
평점: 3.8 / 5.0
- 추천하는 분: 짧지만 밀도 있는 애니메이션을 찾는 분, 성장과 우정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후지모토 타츠키 원작 팬이거나 체인소 맨을 좋아하는 분
- 비추천하는 분: 긴 서사와 풍부한 세계관을 선호하는 분, 판타지적 요소에 거부감이 있는 분, 57분 러닝타임이 가볍게 느껴질 것 같아 아쉬운 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