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 마케팅 팀에 포상 휴가를 줘야 하는 영화
영화 '트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예고편을 만든 마케팅 팀에게는 포상 휴가를, 본편을 만든 팀에게는 각본을 다시 검토할 시간을 줘야 하는 영화. 예고편만 보면 정말 설레는 영화다. 3만 명의 관객, 300명의 경찰, 그리고 홍보부터 신원이 오픈된 연쇄살인마와 경찰 사이의 두뇌 싸움. 그 안에 또 어떤 함정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긴장감. 관객에게 진짜 트랩을 선사할 것 같은 기대감.
근데 막상 본편을 보면 그 기대감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진다. 아주 전형적인 이야기로만 흘러가고, 반전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이상한 길로 빠져나가는 영화. 함정의 함정을 위해서만 달려가다가 결국 수습하지 못할 이야기로 냅다 곤두박질쳐 버린다. 오히려 반전이 영화를 망친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영화 트랩(2024) 기본 정보
- 감독: M. 나이트 샤말란
-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범죄, 블랙 코미디
- 출연: 조쉬 하트넷, 살레카 샤말란, 아리엘 도노휴, 헤일리 밀스 외
- 개봉일: 2024년 9월 18일 (대한민국)
- 상영 시간: 105분
- 제작비: 3,000만 달러
10대 딸 라일리와 함께 인기 팝스타 레이디 레이븐의 콘서트를 찾은 쿠퍼(조쉬 하트넷). 신나게 콘서트를 즐기던 그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이 공연장이 최악의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한 거대한 덫임을 알게 된다. 문제는 그 연쇄살인마가 바로 쿠퍼 자신이라는 것. 수많은 관객과 경찰을 따돌리면서 어린 딸과 함께 이 덫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하는 이야기다.
등장인물 — 기억에 남는 얼굴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이유
쿠퍼 (조쉬 하트넷)
소방관이자 일명 '도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메인 빌런이다. 조쉬 하트넷의 페이스 조절 연기가 이 영화에서 그나마 볼 만한 포인트 중 하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한 아빠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탈출구를 찾는 연쇄살인마의 내면을 오가는 연기는 충분히 흥미롭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에 쏟아지는 주인공 버프가 너무 심해지면서 그 흥미가 점점 희석된다.
라일리 (아리엘 도노휴)
쿠퍼의 딸. 콘서트에 함께 온 설정인데, 이 딸에 대한 설정이 굳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보는 내내 든다. 딸바보로 열심히 살아온 쿠퍼가 어떤 반전의 요소로 인해 너무 쉽게 무너지는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 납득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레이디 레이븐 (살레카 샤말란)
라일리의 우상인 인기 팝스타. 샤말란 감독의 친딸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다. 무대 장면이 꽤 긴 비중을 차지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이 장면이다. 본편보다 감독의 친딸 자랑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는 게 이 영화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닥터 그랜트 (헤일리 밀스)
FBI 프로파일러.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한 이 작전의 배경에 있는 인물이다.
좋았던 점들
조쉬 하트넷의 페이스 조절 연기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콘서트장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딸 옆에서 태연하게 웃으면서, 동시에 탈출구를 찾는 살인마의 눈빛을 오가는 연기는 볼 만하다. 뭔가 더 나올까 하는 기대감으로 보게 만드는 건 결국 조쉬 하트넷 덕분이었다. 각본이 더 탄탄했다면 이 배우의 연기가 훨씬 더 빛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따라온다.
초반 콘서트장 안에서의 긴장감
영화 초반, 콘서트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살인마가 탈출구를 찾는 과정은 나름의 긴장감이 있다. 난간에 계속 부딪히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쿠퍼의 행동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운 구간이 분명히 있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
예고편 마케팅의 완성도
본편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예고편 마케팅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예고편만으로 기대감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완성도 있는 작업이다. 낚인 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는 게 역설적이게도 마케팅에 대한 칭찬이 된다.
아쉬웠던 점들
반전이 영화를 망쳤다
샤말란 감독에게 '반전'이라는 키워드는 거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붙어있다. 그 기대치가 이 영화에도 작용했을 텐데, 정작 이 영화의 반전은 긴장감을 올려주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꺾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함정의 함정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보이는데, 그 결과가 수습하기 힘든 전개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반전이 없었다면 더 나은 영화가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소의 한계를 너무 빨리 포기했다
콘서트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두뇌 싸움을 벌이는 영화, 이 아이디어는 분명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장소가 주는 긴장감의 한계에 부딪히자 너무 쉽게 다른 길을 선택해버린다. 차라리 콘서트장 안에서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어떤 영리함이 나왔을까 하는 마음이 계속 든다. 장소에 의한 아이디어 한계를 인정하고 방향을 틀어버린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주인공 버프가 너무 심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쿠퍼에게 쏟아지는 주인공 버프가 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너무 쉽게 돌파하고, 너무 쉽게 살아남는다. 긴장감이 있으려면 캐릭터가 실제로 위기에 처한다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무게감이 없다 보니 후반부 내내 가볍게만 보인다. 연쇄살인마 캐릭터에 넣어둔 특정 요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간다.
딸 설정의 납득하기 어려운 활용
딸바보 아버지라는 설정을 앞에서 쌓아두고, 정작 그 설정이 활용되는 방식이 납득하기 어렵다.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인물이 어떤 반전의 요소 하나로 너무 쉽게 무너지는 장면은 앞에서 쌓아온 캐릭터와 이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굳이 왜 이 설정을 넣었는지 의문이 드는 선택이었다.
예고편이 너무 많은 걸 보여줬다
예고편 자체는 잘 만들었지만, 그게 오히려 본편의 신선함을 다 잡아먹었다. 예고편에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오픈해버린 탓에 막상 본편을 보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게 없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캐릭터인지 다 알고 들어가는 상태에서 영화가 줄 수 있는 놀라움의 폭이 처음부터 좁아진 셈이다.
마케팅의 힘을 다시 한번 배우고 나온 영화
결국 트랩을 보고 나서 남는 건 조쉬 하트넷의 연기, 그리고 샤말란 감독의 친딸 자랑이다. 그 두 가지가 본편의 이야기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는 게 이 영화의 현실이다.
함정에 걸린 건 예고편을 보고 기대감을 잔뜩 키운 관객들이었다. 관객에게 트랩을 선사할 것 같던 영화가, 정작 관객을 낚은 건 예고편이었다는 아이러니. 샤말란 감독은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영화계에 전염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감독인데, 연속해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다 보니 이제는 차기작에 대해 기대보다 의심을 먼저 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최악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예고편 마케팅은 진심으로 잘 만들었다. 다만 그게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칭찬이라는 게 씁쓸하다. 예고편에 속지 말자를 다시 한번 가르쳐준 고마운 영화로 기억하겠다.
결론 및 최종 평점
마케팅은 신의 한 수, 본편은 반전이 발목을 잡은 영화. 조쉬 하트넷 연기 하나는 건졌다.
평점: 2.3 / 5.0
- 추천하는 분: 조쉬 하트넷의 연기가 보고 싶은 분, 콘서트장이라는 독특한 배경의 스릴러가 궁금한 분, 기대치 없이 가볍게 보실 분
- 비추천하는 분: 예고편을 보고 두뇌 싸움 스릴러를 기대한 분, 샤말란 감독 특유의 반전에 이미 실망한 경험이 있는 분, 탄탄한 각본과 개연성을 중시하는 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