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상대가 작은 것 하나만 챙겨줘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관계가 가까워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행동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고마워"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는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바뀌는 식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오래 만난 사이일수록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통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가 커지는 것과 상대방이 그 기대를 알고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작은 차이도 서운함으로 커질 수 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상대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진다
사람은 관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기대하게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약속 시간을 조금 바꿔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가까운 친구나 연인이 같은 행동을 하면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가까운 관계에서는 상대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 쉽습니다.
연인이 내 취향을 기억해주거나 힘든 날 먼저 연락해주는 경험이 반복되면 "이 사람은 나를 잘 이해해준다"는 느낌이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비슷한 배려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런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대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다만 관계가 오래될수록 기대가 생기는 과정과 그 기대가 상대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따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가 한두 번 먼저 연락해줬다고 해서 앞으로도 내가 힘들 때마다 알아서 연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대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행동이 반복되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행동이 어느 순간 당연한 기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작은 배려가 어느 순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정
기대가 커지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가 늦은 밤에 연락해주면 "피곤할 텐데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연락이 오지 않았을 때 "왜 오늘은 연락을 안 하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행동에 익숙해지면서 기준이 달라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반복적으로 경험한 행동을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예상이 상대방에게는 약속이 아니었을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매주 주말마다 데이트를 준비해줬다고 해서 다음 주에도 반드시 상대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가 매번 내 생일을 세심하게 챙겨줬다고 해서 나 역시 같은 방식의 축하를 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차이를 놓치면 고마웠던 행동이 어느 순간 상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줬는데 왜 지금은 안 해?"라는 생각이 반복되면 상대방의 현재 상황보다 과거의 행동이 기준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관계에서 서운함이 커지는 또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은 기대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배려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나는 힘들 때 혼자 두기보다 먼저 연락해주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대는 힘들 때 조용히 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상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행동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구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내가 원하는 행동
-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동
- 서로 이미 이야기한 약속
- 내가 마음속으로만 기대하고 있는 부분
특히 마지막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힘들 때 먼저 연락해주면 좋겠다"고 말한 뒤에도 상대가 계속 무시한다면 관계에서 조정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알아서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면, 상대가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해서 바로 관심이 없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차이를 구분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이해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비난하는 대신, 무엇이 실제 문제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대와 현실의 차이가 서운함으로 이어지는 순간
기대가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보다 기대한 결과와 실제 행동의 차이가 반복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기념일에는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상대는 평소와 똑같이 하루를 보냈다고 해봅시다.
이때 서운한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원하는 방식에 대해 미리 이야기했는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집니다.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특별하게 준비해줄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미 여러 차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고 서로 기념일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약속까지 했는데 계속 무시한다면 단순한 기대 차이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운함이 생겼을 때는 바로 상대방의 태도를 평가하기보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기대했지?"
그리고 한 번 더 질문해봅니다.
"그 기대를 상대가 알고 있었나?"
마지막으로,
"알고도 반복해서 무시한 것인가, 아니면 서로 기준이 달랐던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만으로도 감정과 상황을 조금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기대를 없애기보다 구체적으로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다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관계가 편해질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관심과 배려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기대를 무조건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좀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대신,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해결책을 말해주기보다 먼저 무슨 일인지 물어봐주면 좋겠어."
라고 이야기하면 상대가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또 내가 원하는 행동이 상대에게 가능한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연락할 수 없는 사람에게 계속 빠른 답장을 기대한다면 두 사람 모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대가 현실적인 범위를 넘어설수록 상대방의 행동은 계속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에서 기대를 조절할 때는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 내가 실제로 원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 상대가 그 기대를 알고 있는지
- 상대의 생활과 성향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요구인지
이 과정을 거치면 "왜 이것도 못 해줘?"라는 막연한 불만이 "나는 이런 행동에서 배려를 느낀다"는 구체적인 대화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실제 대화에서는 '왜'보다 원하는 행동을 설명해보자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종종 "왜 이것도 안 해줘?"입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상대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힘든 날에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A: 내가 힘든 거 알면서 왜 먼저 연락도 안 해?
상대는 "알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대화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A: 내가 힘든 날에는 먼저 한 번 물어봐주면 관심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B: 나는 괜히 연락하면 방해할까 봐 기다렸어. A: 나는 오히려 짧게라도 물어봐주는 게 좋더라. 다음에는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B: 알겠어. 다음에는 먼저 물어볼게.
여기에서는 누가 옳은지를 따지는 것보다 서로의 기준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이런 구체적인 대화가 더 중요해집니다. 말하지 않은 기대를 상대가 알아서 맞추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알려주고 상대가 가능한 범위를 이야기하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상대의 마음까지 단정하지 않기
상대가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과 배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상대는 직접 만났을 때 시간을 내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상대는 평소에 꾸준히 챙기는 것을 더 의미 있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서로 기준이 너무 다르고 조율하려는 노력도 없다면 관계에서 반복적인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내 기대를 한 번 충족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기대의 차이를 알게 된 이후에도 서로 조정할 의지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에서 기대하는 마음은 가까워질수록 자연스럽게 커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대가 생겼다는 사실보다 그 기대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서 기준으로 굳어지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행동이 어느 순간 당연한 의무처럼 느껴지고, 상대가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랑이나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졌다면 먼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나?"라고 자신을 탓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서로 조율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살펴보는 편이 좋습니다.
기대가 없는 관계가 반드시 편안한 관계인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마음을 상대가 당연히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로 확인할 수 있다면, 기대가 서운함으로 쌓이는 일을 조금 줄일 수 있습니다.
